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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by 리사98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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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며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주의의 거장이자 천재화가로 손꼽히는 파블로 피카소의 생애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의 피카소는 회화에서 조각, 판화에서 도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합니다. 상징주의, 야수파,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여러 사조를 뒤섞고 재창조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친 거장입니다. 

 

 

 

 

 

 

 

 

 

 

미술 천재의 탄생

파블로 피카소 (1881년 10월 25일 ~ 1973년 4월 8일) 미술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해 학교를 졸업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습 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는 그림을 그리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그린 '첫 영성체. 1896.'라는 작품에서 이미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기법 등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의 테크닉을 마스터한 수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피카소의 재능을 발견하고 미술학교에 입학시켰지만 규칙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풍경을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19살에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작품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하루 종일 미술관과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대가들의 작품을 정열적으로 탐색했는데 이때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예술세계가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작품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청색 시대와 장미 시대로 일컬어지는 초기 작업, 원시미술에 빠져들게 되는 중기 작업,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를 포괄한 후기 작업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청색시대 (1901 - 1904)

청색시대의 출발은 절친했건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os Cassagemas, 1880 ~ 1901)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살며 빈곤 속에 생활하던 피카소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검푸른색과 짙은 청록색의 색조로 자신의 절망을 표현해 나갑니다. 청색 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에 피카소는 구석진 파리의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겪으면서 비참한 생활상을 주목하고 매춘부, 거지, 방랑자, 빈민의 모습들 그리며 청춘과 사랑, 인간의 삶과 죽음 등을 다뤘습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블루 기간, 우울증)는 1904년까지 지속됩니다. 이후의 그의 작품에는 엄숙한 주제와 따뜻한 색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미 시대 (1904 - 1906)와 입체파

 

 

1904년부터 아름다운 모델 올리비에와 열렬한 사랑에 빠지면서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베이지, 분홍, 빨간색 등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고, 1907년 그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여인들'을 만들면서 마티스를 밀어내고 미술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면서 '입체주의'의 서막이 열립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의 제작을 위해 열여섯 권의 스케치북과 다양한 습작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훗날 이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것으로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5명의 여인들이 360도에서 동시에 보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고,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구도와 심리 묘사가 나타납니다. 여인들의 몸이 과하게 왜곡되었고 몸통은 등이 드러난 뒷모습인데 얼굴은 완전히 반대로 꺾여 정면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시점에서 관찰된 대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한 화면에 모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당시 미술계에 스타였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 ~ 1954) 등 야수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야수파의 강렬한 색과 함께 그의 천재성이 불붙기 시작합니다. 마티스가 화려한 색상에 집중했다면 피카소는 형태에 집중하며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입체파 시대에 한 획을 긋습니다. 그는 야수파 화가들을 통해 아프리카 원시 미술을 접하게 되는데 당시 서구의 회화 양식에서는 보이지 않던 원시적 생명력을 자신의 그림에 담아냅니다.

 

가까운 동료들과 친구들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비판을 일삼았는데 피카소가 이런 형태에 집중했던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사진 기술이 점차 발달하여 현실 세계를 캔버스에 재현하는 미술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카소는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렸습니다.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 ~1918]가 '입체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폴리네르는 비평을 통해 입체주의를 현대미술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입체주의는 크게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세탁선의 변화된 모습

 

 

 

 

 

 

 

 

피카소 시대 : 입체파, 큐비즘 Cubism의 개척자 (1908 - 1914)

로즈 장미 시대 이후 3 년간 피카소는 해양 예술과 아프리카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의 아프리카 시대로 알려진 이 단계는 그의 장미 시대의 온기를 유지했지만 스타일과 주제의 변화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연기자의 비유적 묘사를 생산하기보다는 바르셀로나 매춘에서 예술가 자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인물에 대한 추상적인 아프리카 얼굴조각, 마스크에서 영감을 얻은 묘사를 작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대전과 피카소

1차(1914 ~ 1918) 세계대전과 2차(1939~1945)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피카소는 전쟁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스페인 내전 기간 (1936 ~ 1939) 발표한 작품 'Guernica 게르니카' 1937. 가 대표적입니다. 스페인 소도시인 게르니카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이 작품을 2개월 만에 완성하여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공개했습니다. 전쟁의 광포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투우로 상징화한 작품으로,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아기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동공이 풀려버린 소, 창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말, 건물에서 대피하는 사람들 등 비극적인 현장을 회색톤으로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이 그림의 크기는 349 x 775 cm 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며, 피카소는 이 그림을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렸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주제로 'Massacre in Korea 한국에서의 학살' 1951. 도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피카소는 한국에 방문한 적은 없으나,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 또한 무채색으로 전쟁의 비극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게르티카 .1937.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다채로운 색감과 몽환적인 그림으로 삶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그림에 가득 담았습니다. 불안한 유대인들을 동화 같은 상상력으로 표현하여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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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1925 ~ 1932)

신고전주의 이후 피카소는 다시 자연주의에서 멀어집니다. 1925년, 그는 얼굴 모양이 왜곡되고 몸이 비틀린 모습을 꿈꾸는 인물로 묘사된 스타일리시 한 초현실주의로 작품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초현실적인'작품은 자연스러운 색조와 충돌하는 색상의 부자연스러운 색감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원금감과 유기적 형태와 기하학적 형태로 대비로 강조됩니다. 

 

이렇게 1930년 들어 피카소의 그림은 확실히 더욱 다양해집니다. 자신이 실천했던 거의 모든 미학이 이때 종합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입체파의 기법과 함께 색채에서도 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색채가 강렬하게 변하면서 고전주의 영향도 간간히 가져가 피카소의 그림은 그야말로 피카소만이 할 수 있는 개성적인 작품들이 탄생됩니다. 이 시절 피카소의 작품 정점 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들이 탄생되는데, 그의 모델이 된 여인이 마리테레즈였습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대표작 '꿈''잠자는 여자''붉은 누두 위의 누두 1929' 거울 앞에 잠자는 여인 1932 등 피카소의 그림 중 가장 밝은 그림들입니다.

 

 

 

 

 

 

 

 

 

 

 

 

 

 

 

피카소 후기 작품

피카소의 후기 작업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의 경향을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입체주의는 물론이고, 신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현실주의 시대 이후 그리고 1973년 그가 죽을 때까지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전작과는 달리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각각 그의 과거 시대의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스타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피카소는 다양한 어떤 부류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다방면의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1950년대부터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들을 패러디해 자기만의 양식화한 독특한 모작에서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도 하는데 비난받기도 했지만 피카소는 여전히 명작들을 모작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이 나올 때까지 10번이고 20번이고 그렸다고 합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거의 30개 가까이 그렸는데 퍽 맘에 들었던 소재였나 봅니다. 오늘은 사생활에서 괴짜였고 엉뚱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였지만 예술에선 그림에선 지금까지도 그가 쌓아놓은 업적은 견고합니다. 현대 미술의 거장, 진정한 노력파이기도 했던 파블로 피카소의 시대별로 진화한 작품을 살폈습니다. 

 

피카소의 후기 작업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도예입니다. 그는 60세가 넘어 신화적 주제를 도자기에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회화 작업과 연결 짓습니다. 그는 1947년에서 1948년까지 약 1년 사이에만 대략 2천여 점이 넘는 도예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풍부한 색채와 강렬한 붓 자국이 인상적인 피카소의 도예 작품들은 회화를 넘어 조형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주제적으로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에로스를 표현한 작품이 대다수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1973년 프랑스에서 숨을 거둡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묻혀있는 프로방스 인근의 보베나르그 성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앙리 마티스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활동한 중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20세기를 주름잡는 야수파의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의 조합을 통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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