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샤갈(1887년 7월 7일 ~ 1985년 3월 28일)은 다채로운 색감과 몽환적인 그림으로 삶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그림에 가득 담았습니다. 불안한 유대인들을 동화 같은 상상력으로 표현하여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샤갈은 숨기고 싶은 것, 그의 재산과 스펙, 성격, 신체적 정신적 콤플렉스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은 유태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집은 가난했고, 마르크 샤갈 밑으로는 여덟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티스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예술의 모티브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도 반영했습니다.
도시 내에서 이동까지도 제한되어 샤갈은 지역 안에 있는 유대인 종교 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청어 상인 밑에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야채를 팔았습니다. 어린 샤갈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마을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학교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 친구에게 어떻게 그림을 배웠냐고 물었는데, 그 친구는 '도서관에서 책을 봐. 네가 좋아하는 그림을 골라서 그냥 따라 그리면 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계기였습니다. 그는 책에서의 이미지를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경험이 새롭고 흥미로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차별받고 멸시받는 2등 시민 유대인. 1906년 샤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친구의 통행증을 빌려서 미술 공부를 하였습니다. 초창기 샤갈이 그린 그림을 보면 고전주의 관점에서 그의 그림은 표현력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3년 후 인 1909년 샤갈이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벨라 로젠펠트 (1895 ~1944)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친구,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는 나를 흥분시킵니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고, 그녀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고, 그녀의 눈은 나의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전에 서로를 알고 있었고 그녀는 내 어린 시절,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그녀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샤갈은 그의 자서전에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를 이같이 표현했습니다."
샤갈은 22살 벨라는 14살인 중학생이었습니다. 샤갈은 벨라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뒤로한 채 1910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고, 종종 비테프스크를 방문하여 벨라 로젠펠트를 만났습니다. 그해 말 1910년 샤갈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유대인 정치인 막심 비나베르 후원 덕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프랑스 유학 길에 오른 샤갈은 이때부터 프랑스식 이름인 '마르크 샤갈'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을 사용합니다. 출신은 러시아 제국의 비테프스크 출신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1912년 라 뤼슈에서 작업하며 여러 아방가르드 예술인과 교류합니다. 형태는 입체파, 색채는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양대 산맥인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샤갈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과 언어적인 장벽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기에 그림에 더욱 몰두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보면 고향 비테프스크에 향수가 짙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의 방증이 파리 초기 대표작 나와 마을 1911년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추억 속에 여행을 떠납니다. 소의 젖을 짜는 여인, 일하러 가는 농부와 길을 안내하는 여인 등 소박한 일상이 보입니다. 입체파와 야수파, 초현실주의 (동화적이고 무중력 그림)가 보입니다.
1913년 샤갈의 각별한 친구인 시인 아폴리네르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랑하는 벨라와 결혼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에펠탑의 신랑신부>1913 그런데 이 시기에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화가로써 활동하기에도 힘든 시기였지만, 샤갈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성공한 화가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그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부유한 보석상 상인 집안의 벨라는 보석상인의 집안에 딸이었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벨라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5년 둘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 해에 첫 딸 이다를 갖습니다.
1915년 <생일>이라는 작품을 보면 당시의 기쁨과 행복을 그린 그림으로 결혼하기 며칠 전에 벨라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황홀감과 기쁨의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만든 달콤한 케이크와 구운 생선, 따뜻하게 데운 우유, 색색이 아름다운 천, 심지어 이젤을 만들 나무판까지 작업실로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그녀는 나의 예술의 거대한 중심 이미지이다.' [나의 삶, 마르크 샤갈]
세계대전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하루하루가 두 사람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1918년 도시 위에서'라는 작품에서는 둘이 행복함에 하늘을 나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샤갈은 비테프스크 미술학교 교장자리까지 올랐습니다. 혁명 세력은 샤갈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지만, 샤갈은 말을 듣지 않았고 가족의 목숨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당신의 그림은 레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공산주의를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가" 1922년 러시아를 탈출하여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첫 10년은 샤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으며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습니다. 별장을 지어 남프랑스로 여행을 다닐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사후에 닭, 염소, 말 등의 동물로 영혼이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33년 히틀러 독일 총리 당선 후에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인 샤갈의 작품은 블랙리스트 1순위었습니다. 1939년 '세 개의 촛불' 작품'의 세 개의 촛불은 샤갈, 벨라, 이다를 상징합니다. 샤갈의 가족은 프랑스에도 친 나치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으로 도피하고 1941년 뉴욕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히틀러를 피해 이주한 예술가들이 넘쳐났고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44년 미국으로 이주하고 3년 후에 벨라가 급성 간염으로 병상에 누웠는데, 전시 상황이라 치료제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벨라의 나이는 48세로 벨라가 세상을 떠난 후 샤갈은 1년 동안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벨라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다시금 그의 그림은 밝아졌습니다. '1945년 결혼식의 촛불' 등 사랑은 떠났지만, 사랑의 기억은 남아 있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샤갈은 남프랑스로 와서 거장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루브르에 걸리는 영광도 지켜봤습니다. 1974년에 샤갈은 러이사 땅을 다시 밟았고 1985년에 70여 년 전 샤갈 자신에게 꽃다발을 들고 왔던 벨라처럼. '또다른 빛을 향하여'라는 작품을 완성한 직후 9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그렸으며,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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