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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by 리사98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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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활동한 중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20세기를 주름잡는 야수파의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의 조합을 통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여 포스트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운동을 거쳐 초대현실주의를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오늘은 화려한 색으로 감정을 표현했던 야수파 스타일의 대표 아티스트 앙리 마티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앙리 마티스, 콜라주, 조르주 퐁피두센터 소장. 1946.

 

 

미술이란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것 
-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앙리 마티스의 이카루스(Icarus)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46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 속 태양 가까이 날아가다 추락한 이카루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이카루스는 천재 장인 다이달로스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왕 미노스의 미움을 받아 크레타 섬에 갇히게 되었고, 다이달로스(Daedalus)는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자신과 아들을 위한 날개를 만듭니다. 이 날개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이달로스는 날개를 사용하기 전에 아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로 날개가 젖을 테고, 너무 높게 날면 태양의 열로 밀랍이 녹아버릴 것이다. 중간 고도를 유지하며 날아야 한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카루스는 하늘을 나는 자유에 들떠 경고를 잊고, 점점 더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 결과 태양열로 날개의 밀랍이 녹아버리고, 그는 바다고 추락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과도한 욕망과 경고를 무시한 결과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꿈과 자유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로도 해석되곤 합니다. 

 

마티스의 '이카루스'는 신화의 비극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형태와 대담한 색채를 사용해 인간의 자유와 꿈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이 됩니다. 특히, 붉은 점은 이카루스의 심장을 상징하며, 파란 배경과 노란 별들은 초월적이고 황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이야기를 넘어선 마티스만의 예술적 언어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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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막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북부의 작은 공업도시에서 태어난 앙리 마티스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맹장염에 걸려 지루한 입원 생활을 하던 중에 어머니에게서 선물 받은 물감과 붓으로 그림을 그리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퇴원 후 저녁시간을 쪼개가며 미술 수업을 받습니다. 이때 마티스는 이 길이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진로를 법학에서 미술로 바꾸게 됩니다. 아버지는 생계가 힘든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그는 끝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지지하에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1892년 파리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아카데미 쥘리앙의 부르로의 지도를 받았으나,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정지된 그림을 그리거나 오래된 명작을 베끼는 모사를 주로 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그의 그림은 칙칙한 색이 대부분이어서 오늘날의 마티스를 연상하기 힘듭니다. 당시에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고흐, 고갱, 세잔으로 대표되는 후기 인상파 작품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마티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화풍을 따라 구성적인 Form과 어두운 색조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1893년 파리 보자르의 학교로 입학합니다. 마티스는 파리의 대규모 전시회에서 이전보다 밝은 색상을 사용한 작품을 출시했습니다. 이 작품들이 호평을 받으며 그전까지 무명 화가였던 마티스는 점차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시절에 마티스가 그린 그림을 보면 구성과 형태 그리고 어두운 색조를 중요시했던 우을한 느낌의 그림들과 달리 과감해진 붓놀림과 화려해진 색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마티스는 틀에 박힌 그림이 아닌 마음이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04년 조지 쇠라와 폴 시냑의 작품을 접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조지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림일 것입니다. 빛을 세밀하게 분석한 뒤 수많은 작은 점들을 찍어 완성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3m 정도의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펠리스 페네옹의 초상'이란 작품은 폴 시냑이 점묘법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순수하고 다양한 색들이 리듬감 있고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마티스는 이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서 그들이 위원으로 속해있는 '독립예술가 협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협회는 진보적인 예술단체로 사전심사를 바탕으로 했던 전시와 달리 그림에 관한 심사와 포상을 하지 않는 단체였습니다. 

 

마티스가 출품한 작품은 첫 번째 야수적인 느낌을 드러낸 작품으로 '사치, 고요, 쾌락' (1904, Oil on canvas)이라는 작품입니다. 점묘법을 사용했지만, 기존의 점묘법에 비하면 색채를 과감하게 사용하여 강한 느낌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이후에 그는 '모자를 쓴 여인' (Oil on cnvas, 1905)을 제작하는데 이 작품의 모델은 1898년 결혼한 자신의 아내 아멜리에 노 엘리 파 레이어입니다. 마티스는 점묘법 대신 과감한 붓놀림으로 강렬하고 산뜻한 느낌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본 평론가들은 자연이 가진 아름다운 색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물감을 뒤섞은 야수의 울부짖음이라 혹평하였지만,  마티스는 이 말에 만족하며 작품세계를 넓혀가기 시작합니다. 

 

이후에 그의 정신이 녹아있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삶의 기쁨'을 보면 붓질이 부드러워지고 정교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밝은 빨강과 눈부신 노랑 그리고 깊은 초록 같은 색채를 이용했는데 꽃과 대화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가득한 낙원 속 모습을 그렸습니다. 

 

다섯 명의 사람이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듯이 돌고 있는 춤(Oil on canvas, 1910) 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질서 없고 촌스러운 색과 구조, 부조화스러운 선이라며 비난이 쏟아졌지만. 오늘날 이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들 중 하나입니다. 파랑, 빨강 초록의 세 가지 색만 사용했지만 팽팽하게 맞잡은 손과 땅에서 떠있는 듯한 모습 그리고 뒤틀린 모습을 통해 상당히 빠르게 회전하는 춤 동작을 표현했습니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에너지가 작품 속에 녹아있습니다. 

 

이후로도 마티스는 후기 인상주의 뒤를 이을 강렬한 색상을 사용한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지만, 12살이나 어린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는 창조성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아프리카 등을 여행했는데 이때의 그의 작품을 보면 이슬람 문화권의 화려한 패턴과 장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막

앙리 마티스는 70이 넘은 나이에 십이지장 암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마티스가 더 이상 살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때 마티스는 자신의 담당 의사한테 부탁을 하게 됩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예술 활동을 하게 해 주세요" 이후에 마티스는 본인이 이야기했던 대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두 번의 폐색전증을 같이 앓고 나서 폐가 몹시 안 좋아졌기 때문에 더 이상 몸에 좋지 않은 유화를 사용한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후에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표출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단순화된 드로잉이었고 -지병으로 인하여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더 이상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 색종이와 가위를 이용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이 작품을 Paper cut - outs라고 합니다. 마티스는 가위로 그리는 그림이자 조각가의 정교한 작업과 같다고 만족해했습니다. 이 당시에 만든 작품들에서 해방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티스의 노년을 대표하는 색은 붉은색이라 하면, 노년을 대표하는 색은 푸른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색종이를 한 번에 자른 것이 아니라 관절 관절마다 하얀색으로 비워두면서 운동감을 주었습니다. 마티스는 단순화 시킴과 동시에 운동감을 넣고 싶었습니다. 작품은 한 번의 컷팅으로 매끄럽게 만들지 않았으며, 운동감을 주기 위해서 휘어지는 부분마다 각을 잡아주었습니다. 마티스의 푸른 누드는 멈춰 있는데 보고 있으면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마티스는 위하수증이라는 병을 앓게 되면서 위가 점점 내려앉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그걸 막기 위해서 배에 쇠로 된 벨트를 차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것과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었던 마티스는 노년으로 갈수록 그림의 사이지도 작아지고 그림은 단순화됩니다. 이 시기에는 시와 소설의 삽화를 그리게 됩니다.  마티스는 이러한 드로잉 작품들을 그릴 때 완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눈을 감고 그렸습니다. 

 

마티스는 자신을 옆에서 간병해 주던 소녀가 훗날 수녀가 되어 찾아와 부탁한 로사리오 성당 디자인을 해주기로 합니다. 자신을 돌봐 주었던 그녀를 위해서 자산의 마지막 걸작이라 여기는 로사리오 성당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세라믹에 그린 단순화된 드로잉으로 노란색은 태양, 파란색은 지중해 색, 초록색은 자연을 상징합니다. 노란색의 선인장은 부채선인장으로 강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마티스는 성당의 내부를 색을 칠할 필요가 없이 태양 빛이 스테인 글라스를 비춰 성당 바닥을 채웠으며 가장 보기 좋은 시간대를 정해 한 겨울 낮 11시에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합니다. 마티스는 이 성당 디자인을 마치고 몸이 굉장히 안 좋아지게 됩니다. 작업을 모두 다하고 '내 마지막 작품이 이로서 끝났다..'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80세가 넘을 때까지 미술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고,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1954년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프랑스의 따뜻한 해안도시 니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누구보다 깊은 삶의 열정은 가진 그는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일을 놓지 않고 색종이 작품이 특히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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